9:00 기상.
이젠 새벽에 잠시 깨다가 줄창 잔다.
왜냐고? 나는 힘이 없는 싸나이니까.
배속이 꾸르륵. 니시운동하자마자 영낙없이.
변. 숙변?
색깔이 다시 갈색이다. 코 푼 것 같기는 하지만.
happy님, 이거 정상입니까?
꺼먼 것이 다시 갈색으로 변하는 것이.
happy님 왈.
“어린 소자야, 어찌 그리 숙변에 얽매이느뇨.
변은 변 일뿐. 단식때 숙변은 그리 중요치 않단다.
본단식 2일차까지 마그밀을 먹는 것은 숙변을 끄집어 내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고
배속에 있는 것을 어느 정도 끄집어 내야 속도 편하고 몸에서 냄새가 안나기 때문이단다.
예전에는 마그밀없이 단식 했던 것을 생각하여라.
숙변은 회복식때 시간을 두고 천천히 나올 수도 있단다.
어린 소자는 어린 소치로 쓸데없이 마그밀을 오래, 많이 먹었구나. 쯧쯧쯧.
무식하면 몸이 고달픈 법.
주인 잘못 만난 제 몸이 누구를 원망할꼬, 끌끌끌.”
그동안 저에게 호도되었던 여러분께도 죄송하여여.
샤워 냉온탕. 풍욕. 에이 목하겠다.
나는 힘없는 싸나이니 그냥 침대속에 파묻혀야지.
10:30. 산보.
오늘은 COURSE를 어제의 3배로.
추워서인가? 어제,오늘 없었던 귀 멍해지는(오른쪽 귀) 증상이 또 온다.
독서. “회복의 목회”를 읽고 은혜 많이 받음.
<발췌록>
사람이 생명을 지니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죽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에게 있어 삶의 끝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하루를 살았다는 것은 하루만큼 죽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죽는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사는 것이다.
죽음을 향해 오늘 하루를 나아갔다는 것은 ‘오늘’이란 하루를 살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죽는 것이요, 죽는다는 것은 사는 것이다.
죽음을 알지 못한채 살아간다는 것은 하루하루 의미없이 죽어가는 것일 뿐이요,
죽음을 알고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매일 사는 것이다.
즉, 죽음을 아는 자만이 바른 생명의 사람이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무지한 자들은 자신의 생명을 허망한 욕망을 위하여 어이없이
탕진할 뿐.
그러나 언젠가 원치 아니한 때에 원치 않는 곳에서 원치않는 방법으로 엄습하게될
죽음을 직시하면서 살아가는 자는 죽음을 알기 때문에 하루하루 참된 삶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한 생명의 가치와 무게를, 그가 누구이든 상관없이 내 생명의 무게, 가치와
동일하게 존중하는 행위.
생명마다 무게와 가치가 다 다르다고 생각하는한, 특히 내 자신 생명의 무게와 가치가
이 세상에서 가장 무겁다고 여가는 한, 결코 사랑을 할 수 없다.
사랑은 생명의 등가성(等價性)에서 시작한다.
이것을 깨달을 때에만 내 생명을 사랑하듯 타인의 생명을 구별없이 모두 사랑할 수 있다.
모든 생명의 등가성을 인식할 때만 타인의 생명을 위한 자기헌신과 자기낭비가 가능하다.
사랑의 특징은 반드시 헌신과 낭비가 수반된다는 것이다.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아낌없이 주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아깝게 여겨진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모든 것을 다 주고도 아쉬워 하는 것이 사랑이다.
경제논리에 얽매여서는 사랑은 현실화될 수 없다.
경제논리 속에서는 모든 생명이 도구일 뿐이다.
그래서 많이 가진 자일수록 사랑하기가 힘들다.
사랑하기 위해 우리는 언제든지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눕거나 앉았다 일어나면 심한 현기증을.
본단식 3일차부터 있던 가려움증은 많이 없어졌다.
입냄새도 많이 없어졌다. 소변은 탁하지는 않으나 계속 노란색.
왜 이럴까?
남들은 4,5일째 소변이 맑아 진다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나?
내가 안 한 것이 무엇인가?
-------- 또그르르르르-------- 돌구르는 소리.
아! 알았다. 운동이다.
너무 운동을 안했다. 아침에 니시 20분. 산보 20분 끝.
운동량이 적어 노폐물 배출이 잘 안된 것이다.
특히 4일차부터는 환자 행세를 해왔으니.
으아, 진작 깨달았으면 지금쯤 된장국에 죽과 김치를 즐기고 있을텐데.
벌써 새벽 1:10. 미예님, 지연님 단식 일 수가 점점 늘어가네. 파팅!!!
이젠 새벽에 잠시 깨다가 줄창 잔다.
왜냐고? 나는 힘이 없는 싸나이니까.
배속이 꾸르륵. 니시운동하자마자 영낙없이.
변. 숙변?
색깔이 다시 갈색이다. 코 푼 것 같기는 하지만.
happy님, 이거 정상입니까?
꺼먼 것이 다시 갈색으로 변하는 것이.
happy님 왈.
“어린 소자야, 어찌 그리 숙변에 얽매이느뇨.
변은 변 일뿐. 단식때 숙변은 그리 중요치 않단다.
본단식 2일차까지 마그밀을 먹는 것은 숙변을 끄집어 내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고
배속에 있는 것을 어느 정도 끄집어 내야 속도 편하고 몸에서 냄새가 안나기 때문이단다.
예전에는 마그밀없이 단식 했던 것을 생각하여라.
숙변은 회복식때 시간을 두고 천천히 나올 수도 있단다.
어린 소자는 어린 소치로 쓸데없이 마그밀을 오래, 많이 먹었구나. 쯧쯧쯧.
무식하면 몸이 고달픈 법.
주인 잘못 만난 제 몸이 누구를 원망할꼬, 끌끌끌.”
그동안 저에게 호도되었던 여러분께도 죄송하여여.
샤워 냉온탕. 풍욕. 에이 목하겠다.
나는 힘없는 싸나이니 그냥 침대속에 파묻혀야지.
10:30. 산보.
오늘은 COURSE를 어제의 3배로.
추워서인가? 어제,오늘 없었던 귀 멍해지는(오른쪽 귀) 증상이 또 온다.
독서. “회복의 목회”를 읽고 은혜 많이 받음.
<발췌록>
사람이 생명을 지니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죽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에게 있어 삶의 끝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하루를 살았다는 것은 하루만큼 죽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죽는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사는 것이다.
죽음을 향해 오늘 하루를 나아갔다는 것은 ‘오늘’이란 하루를 살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죽는 것이요, 죽는다는 것은 사는 것이다.
죽음을 알지 못한채 살아간다는 것은 하루하루 의미없이 죽어가는 것일 뿐이요,
죽음을 알고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매일 사는 것이다.
즉, 죽음을 아는 자만이 바른 생명의 사람이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무지한 자들은 자신의 생명을 허망한 욕망을 위하여 어이없이
탕진할 뿐.
그러나 언젠가 원치 아니한 때에 원치 않는 곳에서 원치않는 방법으로 엄습하게될
죽음을 직시하면서 살아가는 자는 죽음을 알기 때문에 하루하루 참된 삶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한 생명의 가치와 무게를, 그가 누구이든 상관없이 내 생명의 무게, 가치와
동일하게 존중하는 행위.
생명마다 무게와 가치가 다 다르다고 생각하는한, 특히 내 자신 생명의 무게와 가치가
이 세상에서 가장 무겁다고 여가는 한, 결코 사랑을 할 수 없다.
사랑은 생명의 등가성(等價性)에서 시작한다.
이것을 깨달을 때에만 내 생명을 사랑하듯 타인의 생명을 구별없이 모두 사랑할 수 있다.
모든 생명의 등가성을 인식할 때만 타인의 생명을 위한 자기헌신과 자기낭비가 가능하다.
사랑의 특징은 반드시 헌신과 낭비가 수반된다는 것이다.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아낌없이 주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아깝게 여겨진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모든 것을 다 주고도 아쉬워 하는 것이 사랑이다.
경제논리에 얽매여서는 사랑은 현실화될 수 없다.
경제논리 속에서는 모든 생명이 도구일 뿐이다.
그래서 많이 가진 자일수록 사랑하기가 힘들다.
사랑하기 위해 우리는 언제든지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눕거나 앉았다 일어나면 심한 현기증을.
본단식 3일차부터 있던 가려움증은 많이 없어졌다.
입냄새도 많이 없어졌다. 소변은 탁하지는 않으나 계속 노란색.
왜 이럴까?
남들은 4,5일째 소변이 맑아 진다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나?
내가 안 한 것이 무엇인가?
-------- 또그르르르르-------- 돌구르는 소리.
아! 알았다. 운동이다.
너무 운동을 안했다. 아침에 니시 20분. 산보 20분 끝.
운동량이 적어 노폐물 배출이 잘 안된 것이다.
특히 4일차부터는 환자 행세를 해왔으니.
으아, 진작 깨달았으면 지금쯤 된장국에 죽과 김치를 즐기고 있을텐데.
벌써 새벽 1:10. 미예님, 지연님 단식 일 수가 점점 늘어가네. 파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