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석루 벼랑에 새겨진 이름들은 누구?
대부분 친일파...'한규설' '강상호' '산홍'은 귀감으로 삼아
윤성효기자 <IMG border=0 src="http://www.ohmynews.com/images/article/i_email_09.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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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 남강 촉석루와 그 아래 벼랑 모습.
ⓒ2003 오마이뉴스 윤성효
진주 촉석루 벼랑에는 수많은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대개 관광객들은 촉석루와 의암을 둘러보고 발길을 돌리기 일쑤다. 이곳 벼랑에 있는 이름들은 촉석루 난간이나 의암에 서서 아무리 목을 쑥 빼고 봐도 보이지 않는다. 보트를 타고 남강으로 가야만 볼 수 있다. 그래서 일반 관광객들은 지나치기 쉽다.
모두 한자로 새겨진, 크고 작은 이름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역사의 고장' 진주에서도 촉석루 벼랑에 새겨져 있는 이름의 유래와 그 주인공들의 면면을 정리한 사실이 없다. 진주사람들이 이 정도니 일반 관광객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진주성과 촉석루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보트를 타고 벼랑에 새겨진 이름을 찾아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거리일 것이다.
그 이름의 주인공들은 후세에 좋은 이름으로 전해지길 바라면서 새겼을 것이다. 그러나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우선 자연훼손이라는 지적도 그렇지만, 상당수 이름들이 민족의 운명을 저버리고 일제에 빌붙어 개인의 영달을 누렸던 친일파들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촉석루 벼랑은 '오욕의 현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면 과연 그 이름들은 언제 새겨졌을까? 기록이 없어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다. 상당수 이름을 보면 구한말부터 일제시대 이름을 날리거나 권세를 부렸으며, 남강과 촉석루와 관련이 있는 이름들이다. 그래서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촉석루 벼랑에 새겨진 이름 중 친일파가 아닌 인물들이 있어 눈길을 끈다. 바로 한규설(韓圭卨), 강신호(姜信鎬), 산홍(山紅)이다. 수십명의 이름 대부분은 친일파로, 어떤 이는 지워버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가 하면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처럼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이들 세 이름은 그렇지 않았던 인물이다. '오욕의 현장'으로 되어버린 촉석루 벼랑에 함께 새겨져 있는 이들 세 명은 과연 어떤 인물들인지 더듬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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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석루 벼랑에는 수많은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2003 오마이뉴스 윤성효
한규설 :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했던 인물, 일제의 '남작'도 거부
한규설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했던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서울 출생의 한규설은 무과에 등제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형조와 공보판서를 지냈고, 한성부 판윤을 지내기도 했다. 1905년 참정대신으로 내각에 참여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 전권대사 이토(伊藤博文)가 각료들에게 개별적으로 '을사조약'에 대한 찬성과 반대 입장을 물었는데, 한규설은 끝까지 반대했다. 이에 한규설은 조약 체결 뒤 곧바로 파면되었다. 그뒤 다시 중추원 고문과 궁내부 특진관 등을 지냈고, 1910년 일제는 그에게 '남작'을 부여했으나 거절했다.
이런 한규설의 이름이 왜 촉석루 벼랑에 새겨졌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구한말 진주는 지금의 도청 소재지에 해당하는 영남포정사가 있어 관찰사가 기거하기도 했는데, 당시 관찰사 등을 거친 사람들의 이름이 바위에 새겨진 사례는 있다. 하지만 한규설은 진주와 어떤 인연이 있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어,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한 그의 정신을 이어받으려는 사람들이 촉석루 벼랑에 이름을 새겼을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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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석루 벼랑에 있는 강신호 이름
ⓒ2003 오마이뉴스 윤성효
강신호 : 24살에 요절한 서양화가, 두 번째 개인전 직전 남강에 빠져 죽어
요절화가 강신호(1904~1927)는 백정의 신분해방운동이었던 형평운동을 이끌었던 강상호 선생의 동생이다. 진주 최초의 서양화가인 그는 진주 미술사에 큰 획을 그었던 인물이다. 1924년 휘문고 재학 때 <아침의 정물>이란 작품을 '선전'에 출품하기도 했고, 동경미술학교에 다니면서 그림 <작품 제9> <정물> <의자> 등을 남겼다.
그는 1925년 여름 진주성 공원 안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는데, 여인의 나체 그림을 포함해 '선전' 입상작도 선보였다. 1927년 <바구니를 든 사내>라는 작품을 '선전'에 내놓아 입선을 한 그는 두 번째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자살하고 만다.
강신호는 작품을 전시장에 걸어두고 집에서 술을 먹은 뒤, 그대로 남강에 뛰어들어 숨을 거둔 거이다. 향년 24살이었다. 그의 두 번째 개인전은 '추도전람회'가 되고 말았으며, 이 전시회는 진주청년회 주관으로 열렸고, 그의 유작전은 이듬해 서울 천도기념관에서 열리기도 했다.
촉석루 벼랑에 '강상호'라는 이름이 언제 누가 새겼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남들보다 부유하게 살았던 집안에서 태어난 강상호가 남강에서 죽자 그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벼랑에 새긴 것으로 보인다.
산홍 : '을사5적' 이지용에 당당히 맞선 기생, <매천야록>에도 기록
촉석루 벼랑에는 '산홍'이란 이름도 있는데, 그는 누구인가. 당시 지체 높았던 권세가문의 어르신들(?) 이름 곁에 있는 이 이름의 주인공은 바로 기생이다. 당시까지 진주는 '남진주 북평양'이라 할 정도로 진주기생은 조선 8도에서 그 명성이 자자했다. 당대 제일가는 어르신들 곁에 이름이 오를 정도였으니 그 기생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황현의 <매천야록>(광무 10년조)에 보면, '산홍'에 대한 기록이 있다. "진주기생 산홍은 얼굴이 아름답고 서예도 잘했다. 이때 이지용이 천금을 가지고 와서 첩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자 산홍은 사양하기를, '세상사람들이 대감을 5적의 우두머리라고 하는데 첩이 비록 천한 기생이긴 하지만 사람 구실하고 있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 하였다. 이지용이 크게 노하여 산홍을 때렸다"라고.
이지용은 이완용과 같은 '을사5적'이다. 1907년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며, 당대 그의 권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만큼 대단했다. 매국노에 당당히 맞선 기생 '산홍'의 기개를 알만하다. 매천 황현도 비록 기생이지만 그 기개를 높이 샀고, 세상에 소개까지 했던 것이다.
기생 산홍은 논개를 생각한 시를 한 편 남겼다. 진주 의기사에는 산홍이 쓴 시가 걸려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진주의 의로움 / 두 사당에 또 높은 다락 있네 / 일 없는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부끄러워 / 피리와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 놀고있네"라고. 논개는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빠져 의로운 죽음을 보여주었지만 자신은 피리와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나 놀고있는 신세를 한탄한 시다.
촉석루 벼랑에 있는 '산홍'이란 글씨를 누가 썼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기개에 감복한 한 사람이 정성 들여 정을 쪼아가며 이름을 새겼을 것으로 짐작된다.
[의암] 관광객들은 '의암(義巖)' 위에 서서 진주교에 매달린 쌍가락지를 보면서 논개의 순국정신을 떠올린다. 바위 옆면에 보면 '의암'이라 새겨져 있는데, 그 유래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의암'은 촉석루 아래 남강 가운데 솟아있는 바위다. 크기는 가로 3.65미터, 세로 3.3미터다. 바위에는 두 개의 '의암'이란 글씨가 있는데, 서쪽 벽면의 전자체 '의암'은 조선조 선비 정대륭이 쓴 것이다. 남쪽 벽면의 해서체 '의암'은 조선조 선비 한몽삼이 쓴 것이다. 그리고 정대륭이 쓴 글씨는 논개의 의로운 죽음을 상징한 최초의 금석문이라 할 수 있다. 경남도는 논개의 순국정신이 깃들어 있는 '의암'을 지난해 도기념물로 지정했다.
대부분 친일파...'한규설' '강상호' '산홍'은 귀감으로 삼아
윤성효기자 <IMG border=0 src="http://www.ohmynews.com/images/article/i_email_09.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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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 남강 촉석루와 그 아래 벼랑 모습.
ⓒ2003 오마이뉴스 윤성효
진주 촉석루 벼랑에는 수많은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대개 관광객들은 촉석루와 의암을 둘러보고 발길을 돌리기 일쑤다. 이곳 벼랑에 있는 이름들은 촉석루 난간이나 의암에 서서 아무리 목을 쑥 빼고 봐도 보이지 않는다. 보트를 타고 남강으로 가야만 볼 수 있다. 그래서 일반 관광객들은 지나치기 쉽다.
모두 한자로 새겨진, 크고 작은 이름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역사의 고장' 진주에서도 촉석루 벼랑에 새겨져 있는 이름의 유래와 그 주인공들의 면면을 정리한 사실이 없다. 진주사람들이 이 정도니 일반 관광객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진주성과 촉석루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보트를 타고 벼랑에 새겨진 이름을 찾아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거리일 것이다.
그 이름의 주인공들은 후세에 좋은 이름으로 전해지길 바라면서 새겼을 것이다. 그러나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우선 자연훼손이라는 지적도 그렇지만, 상당수 이름들이 민족의 운명을 저버리고 일제에 빌붙어 개인의 영달을 누렸던 친일파들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촉석루 벼랑은 '오욕의 현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면 과연 그 이름들은 언제 새겨졌을까? 기록이 없어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다. 상당수 이름을 보면 구한말부터 일제시대 이름을 날리거나 권세를 부렸으며, 남강과 촉석루와 관련이 있는 이름들이다. 그래서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촉석루 벼랑에 새겨진 이름 중 친일파가 아닌 인물들이 있어 눈길을 끈다. 바로 한규설(韓圭卨), 강신호(姜信鎬), 산홍(山紅)이다. 수십명의 이름 대부분은 친일파로, 어떤 이는 지워버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가 하면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처럼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이들 세 이름은 그렇지 않았던 인물이다. '오욕의 현장'으로 되어버린 촉석루 벼랑에 함께 새겨져 있는 이들 세 명은 과연 어떤 인물들인지 더듬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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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석루 벼랑에는 수많은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2003 오마이뉴스 윤성효
한규설 :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했던 인물, 일제의 '남작'도 거부
한규설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했던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서울 출생의 한규설은 무과에 등제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형조와 공보판서를 지냈고, 한성부 판윤을 지내기도 했다. 1905년 참정대신으로 내각에 참여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 전권대사 이토(伊藤博文)가 각료들에게 개별적으로 '을사조약'에 대한 찬성과 반대 입장을 물었는데, 한규설은 끝까지 반대했다. 이에 한규설은 조약 체결 뒤 곧바로 파면되었다. 그뒤 다시 중추원 고문과 궁내부 특진관 등을 지냈고, 1910년 일제는 그에게 '남작'을 부여했으나 거절했다.
이런 한규설의 이름이 왜 촉석루 벼랑에 새겨졌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구한말 진주는 지금의 도청 소재지에 해당하는 영남포정사가 있어 관찰사가 기거하기도 했는데, 당시 관찰사 등을 거친 사람들의 이름이 바위에 새겨진 사례는 있다. 하지만 한규설은 진주와 어떤 인연이 있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어,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한 그의 정신을 이어받으려는 사람들이 촉석루 벼랑에 이름을 새겼을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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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석루 벼랑에 있는 강신호 이름
ⓒ2003 오마이뉴스 윤성효
강신호 : 24살에 요절한 서양화가, 두 번째 개인전 직전 남강에 빠져 죽어
요절화가 강신호(1904~1927)는 백정의 신분해방운동이었던 형평운동을 이끌었던 강상호 선생의 동생이다. 진주 최초의 서양화가인 그는 진주 미술사에 큰 획을 그었던 인물이다. 1924년 휘문고 재학 때 <아침의 정물>이란 작품을 '선전'에 출품하기도 했고, 동경미술학교에 다니면서 그림 <작품 제9> <정물> <의자> 등을 남겼다.
그는 1925년 여름 진주성 공원 안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는데, 여인의 나체 그림을 포함해 '선전' 입상작도 선보였다. 1927년 <바구니를 든 사내>라는 작품을 '선전'에 내놓아 입선을 한 그는 두 번째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자살하고 만다.
강신호는 작품을 전시장에 걸어두고 집에서 술을 먹은 뒤, 그대로 남강에 뛰어들어 숨을 거둔 거이다. 향년 24살이었다. 그의 두 번째 개인전은 '추도전람회'가 되고 말았으며, 이 전시회는 진주청년회 주관으로 열렸고, 그의 유작전은 이듬해 서울 천도기념관에서 열리기도 했다.
촉석루 벼랑에 '강상호'라는 이름이 언제 누가 새겼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남들보다 부유하게 살았던 집안에서 태어난 강상호가 남강에서 죽자 그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벼랑에 새긴 것으로 보인다.
산홍 : '을사5적' 이지용에 당당히 맞선 기생, <매천야록>에도 기록
촉석루 벼랑에는 '산홍'이란 이름도 있는데, 그는 누구인가. 당시 지체 높았던 권세가문의 어르신들(?) 이름 곁에 있는 이 이름의 주인공은 바로 기생이다. 당시까지 진주는 '남진주 북평양'이라 할 정도로 진주기생은 조선 8도에서 그 명성이 자자했다. 당대 제일가는 어르신들 곁에 이름이 오를 정도였으니 그 기생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황현의 <매천야록>(광무 10년조)에 보면, '산홍'에 대한 기록이 있다. "진주기생 산홍은 얼굴이 아름답고 서예도 잘했다. 이때 이지용이 천금을 가지고 와서 첩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자 산홍은 사양하기를, '세상사람들이 대감을 5적의 우두머리라고 하는데 첩이 비록 천한 기생이긴 하지만 사람 구실하고 있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 하였다. 이지용이 크게 노하여 산홍을 때렸다"라고.
이지용은 이완용과 같은 '을사5적'이다. 1907년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며, 당대 그의 권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만큼 대단했다. 매국노에 당당히 맞선 기생 '산홍'의 기개를 알만하다. 매천 황현도 비록 기생이지만 그 기개를 높이 샀고, 세상에 소개까지 했던 것이다.
기생 산홍은 논개를 생각한 시를 한 편 남겼다. 진주 의기사에는 산홍이 쓴 시가 걸려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진주의 의로움 / 두 사당에 또 높은 다락 있네 / 일 없는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부끄러워 / 피리와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 놀고있네"라고. 논개는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빠져 의로운 죽음을 보여주었지만 자신은 피리와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나 놀고있는 신세를 한탄한 시다.
촉석루 벼랑에 있는 '산홍'이란 글씨를 누가 썼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기개에 감복한 한 사람이 정성 들여 정을 쪼아가며 이름을 새겼을 것으로 짐작된다.
[의암] 관광객들은 '의암(義巖)' 위에 서서 진주교에 매달린 쌍가락지를 보면서 논개의 순국정신을 떠올린다. 바위 옆면에 보면 '의암'이라 새겨져 있는데, 그 유래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의암'은 촉석루 아래 남강 가운데 솟아있는 바위다. 크기는 가로 3.65미터, 세로 3.3미터다. 바위에는 두 개의 '의암'이란 글씨가 있는데, 서쪽 벽면의 전자체 '의암'은 조선조 선비 정대륭이 쓴 것이다. 남쪽 벽면의 해서체 '의암'은 조선조 선비 한몽삼이 쓴 것이다. 그리고 정대륭이 쓴 글씨는 논개의 의로운 죽음을 상징한 최초의 금석문이라 할 수 있다. 경남도는 논개의 순국정신이 깃들어 있는 '의암'을 지난해 도기념물로 지정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