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뭉클한 사연이 있어 퍼왔습니다... 따뜻해지네요~ ^^
20여년 동안 애타게 찾은 친구의 소식
20년만에... 그는 목사님이 되어 있었습니다
송성영 기자 <IMG border=0 src="http://www.ohmynews.com/images/article/i_email_09.gif">
얼마 전 이메일을 만들어 놓은 이래로 가장 반가운 소식 한 통이 날아왔습니다. 나는 그 이메일을 받아보자마자 사랑방 문을 화들짝 열어제치고 소리쳤습니다.
"여보! 왔어! 왔다구! 얼른 이리 좀 와봐!"
"뭘? 뭐가 왔는데?"
지난 10여 년 동안 내가 그토록 애타게 찾던 사람, 이한신. 그 친구로부터 편지 한 통이 날아왔던 것입니다.
그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송성영, 그래요, 이름은 알겠는데, 설마 동명이인이겠지하며 메일을 열었어요. 다 기억납니다. 마치 엊저녁 잠들기 전에 한 이야기인 듯하고, 만났던 모습들이 희미하지만 내가 아는 그 송성영임을 확인할 수 있어요. 참 놀랍군요. 어느덧 20년도 넘은 세월이 지났는데 무엇이 이리도 반갑게 하는지......'
정확히 21년 전, 그와 나 사이에는 단 4주간의 만남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 동안 그를 찾기 위해 온갖 궁리를 다 했습니다. 그가 했던 말이나 그가 보냈던 편지글 등의 여러 정황을 토대로 그의 행방을 추적해 보기도 했지만 전혀 실마리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재작년부터는 인터넷 검색을 시도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오마이뉴스>에 올릴 군대 얘기('누가 방아쇠를 당길 것인가')를 쓰다가 문득 그 친구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무작정 인터넷 검색에 '이한신'이라는 단어를 찍어 보았습니다.
이전에도 그랬듯이 막연한 기대감으로 '이한신'에 관한 기사들을 꼼꼼히 훑어 봤습니다. 혹시나 그 동안 새로운 기사가 올라와 있는지도 모르니까요. 인터넷에 올라 온 이한신이라는 이름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이한신에 관련된 수많은 기사들 중에서 기독교 관련 잡지에 '이한신 목사님'이 쓴 글이 눈에 띄었습니다.
나와 연배가 비슷한 그는 10여 년 전 경기도 용인 땅에 개척교회를 세우기도 했었습니다. 나는 그 잡지에 실린 단체를 찾아 전화를 걸었고 거기서 이한신이라는 사람의 이메일 주소를 천신만고 끝에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찾는 그 친구일 것이라는 확신과 믿음으로 다음과 같은 장문의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안녕하세요? 송성영이라고 합니다. 님께서는 아마 처음 듣는 이름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한신'라는 사람을 애타고 찾고 있습니다. 지금 메일을 받아보시는 분이 제가 찾고 있는 그 '이한신' 님인지는 저 자신도 잘 모릅니다. 어쩌면 동명이인 일런지도 모르니까요.
제가 찾는 사람(이한신)은 21년 전, 그러니까 1982년 4월부터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병 생활을 같이 했던 사람입니다. 당시 제 바로 옆 침상에 누었던 사람인데 그와 나는 취침에 들기 전 혹은 훈련 휴식 시간에, 그 짧고 힘겨운 시간 동안 우리는 종교에 관한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답니다. 그 때 이한신이라는 친구는 전도사(?)였던 것 같습니다. 형님이 경기도 성남에서 목회자로 계셨던가? 너무 오래된 일이라 가물가물합니다.
논산에서 훈련을 마치고 서로 다른 병과에 따라 각자의 부대로 떠났고, 그 이후로도 줄곤 편지 왕래를 하기도 했답니다. 그때도 우리는 종교에 관한 서로의 생각들을 주고받곤 했었답니다.
군 제대 후 그 친구가 찾아왔었습니다. 헌데 내가 그 친구를 그냥 돌려보냈던 같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그 소중한 친구를 돌려보냈던 것일까? 무엇에 그토록 정신이 팔려 있었는지 생각이 잘 나지 않습니다(아마 제가 그때 대학에서 총학생회 일로 정신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때 그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답니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이런저런 일에 몰두하다가 정신세계에 깊이 빠져들어 한동안 홀로 산 생활을 했던 적이 있었답니다. 그때 지나 온 세월을 더듬어 보다가 새파랗게 젊은 시절, 그 한가운데 이한신이라는 친구가 있었답니다.
그와 단 4주간의 만남이었는데 그토록 오랫동안 내 가슴에 남아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때부터 생각날 때마다 그 친구를 찾아 나섰지만 전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답니다.
아마 예산? 어딘가가 고향이라는 기억이 있습니다. 혹여 님께서 그 님이라면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부디 그 이한신이라는 친구이길 바라며... 만약 아니시라면 죄송한 말씀 미리 올립니다.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독백 형식으로 그리움을 담아 보낸 편지였는데 아, 그걸 받아본 사람이 바로 내가 그토록 찾던 그 친구였던 것이었습니다.
이한신, 그 친구는 지금 말레이시아 페낭에 있다고 합니다. 결혼하고 17살 된 아들 하나, 13살 된 딸 하나를 두었다고 합니다. 우연일까? 1990년, '명상'이라는 잡지를 준비하면서 내가 인도행을 꿈꾸었던 그 무렵 그는 한국을 떠나 인도에서 3년 동안 생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싱가폴에서 공부 좀 하고 94년부터 줄곤 말레이시아에서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나는 편지를 다 읽자마자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곧바로 답장을 보냈습니다. 제대 후 나를 찾아왔을 때 그냥 돌려보낸 일을 사죄했고 '<오마이뉴스>에 글 쓰기' 등 지금 내가 하는 일들을 상세하게 적어 가족 사진까지 동봉했습니다.
사진 속에 나는 빡빡 머리 훈련병이 아닌, 긴 머리에 긴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그는 나를 알아 볼 수 있을 것 같다며 다시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알아볼 수 있어요. 예전의 그 얼굴을 떠 올려보았었는데 얼굴이나 몸은 나이에 맞추느라 세월의 풍파에 견딘 모습이구려. 여전히 그 얼굴이라서 아마 거리에서 만나면 역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지난 주간에는 아내와 함께 송형이 올린 <오마이뉴스>의 여러 글들을 읽느라 늦게까지 잠을 안 자서 할 일도 제대로 못한 적이 여러 번 있었어요. 아내는 나보고 좋겠다고 합니다. 내가 원하기도 했던 삶을 친구가 살고 있고 그 내용들을 자세하게 글로 남겨놓았다고 말이지요...(중략)
송형의 글에서 여전히 20대 초에 가지고 있었던 많은 질문들이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많은 이론이 더해졌겠고, 나름대로의 철학이 담을 쳤으리라 믿지만... (중략)
나는 아직 컴퓨터를 잘 몰라요. 우리는 디지털 카메라나 스캐너도 없지만 어떻게 사진을 보내야 할지도 몰라요. 사진을 보내줄 수 없음을 아쉽게 생각합니다... (하략)'
그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 없지만 나 또한 그를 만나면 알아볼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의 편지글에는 20년 전 그의 모습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아주 차분하고 조용조용한 말씨, 사람 좋은 표정을 읽어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 머리 속에 오래 동안 각인되어 있는 그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편지글을 통해 20대 초에 가졌던 생각들에서 얼마나 멀리 와 있는지를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20년 전 나는 아주 즉흥적이고 감정적이었습니다. 오만 방자한 젊은 혈기로 그의 믿음을 시험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그에게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에 천당과 지옥이 있다. 너희들이 말하는 죽어서 천당을 택하느니 차라리 이곳, 지옥을 선택하겠다. 죽어서 가는 천당은 참으로 재미없을 것이다. 담배도 술도 섹스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죽어서 천당보다는 차라리 살아서 지옥을 택하겠다'는 식으로 그를 어지간히도 괴롭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마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아주 편안하게 나를 대해줬고 종교가 왜 필요한지, 왜 하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지를 편안하게 설명해줬던 것 같습니다. 군에서 제대하면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위해 목회자의 길을 걷겠다고 했던 그는 그때 이미 독기 오른 훈련병의 고단함을 다독여 준 나의 목사님이었습니다.
사실 그의 편지글을 통해 지금도 그럴 것이다, 라고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지 나는 잘 모릅니다.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위해 목회자의 길을 걷겠다고 했던 그가 지금은 어떤 목회자가 되어 있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변해 있건간에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그는 인자한 목사님입니다. 지난 20년 동안 가슴에 담아 두고 찾아 헤맸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으니까요.
어제는 우리 집 큰 아이, 인효를 컴퓨터 앞에 앉혀 놓고 그 친구의 메일을 꺼내 자랑했답니다.
"아빠도 이제 스님 친구만 있는 게 아니다, 목사님 친구도 있다. 자 봐라 이게 20년만에 만나게 된 아빠 친구한데서 온 편진데, 이 친구가 아주 맘씨 착한 목사님이셔..."
언젠가 큰 아이가 그랬거든요.
"아빠는 왜 맨날마다 스님 친구만 있구, 목사님 친구는 없어?"
그는 6월 11일 경에 4주 정도 가족들과 함께 한국에 올 일이 있다고 합니다. 4주 동안의 짧은 만남, 그리고 20년 만에 다시 만난 사람, 그 친구를 어서 빨리 보고 싶습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 보고 싶습니다.
그를 다시 만남으로 하여 군대 생활 속으로 사라져 버린 20대 초의 젊은 나를 되찾은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20여년 동안 애타게 찾은 친구의 소식
20년만에... 그는 목사님이 되어 있었습니다
송성영 기자 <IMG border=0 src="http://www.ohmynews.com/images/article/i_email_09.gif">
얼마 전 이메일을 만들어 놓은 이래로 가장 반가운 소식 한 통이 날아왔습니다. 나는 그 이메일을 받아보자마자 사랑방 문을 화들짝 열어제치고 소리쳤습니다.
"여보! 왔어! 왔다구! 얼른 이리 좀 와봐!"
"뭘? 뭐가 왔는데?"
지난 10여 년 동안 내가 그토록 애타게 찾던 사람, 이한신. 그 친구로부터 편지 한 통이 날아왔던 것입니다.
그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송성영, 그래요, 이름은 알겠는데, 설마 동명이인이겠지하며 메일을 열었어요. 다 기억납니다. 마치 엊저녁 잠들기 전에 한 이야기인 듯하고, 만났던 모습들이 희미하지만 내가 아는 그 송성영임을 확인할 수 있어요. 참 놀랍군요. 어느덧 20년도 넘은 세월이 지났는데 무엇이 이리도 반갑게 하는지......'
정확히 21년 전, 그와 나 사이에는 단 4주간의 만남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 동안 그를 찾기 위해 온갖 궁리를 다 했습니다. 그가 했던 말이나 그가 보냈던 편지글 등의 여러 정황을 토대로 그의 행방을 추적해 보기도 했지만 전혀 실마리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재작년부터는 인터넷 검색을 시도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오마이뉴스>에 올릴 군대 얘기('누가 방아쇠를 당길 것인가')를 쓰다가 문득 그 친구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무작정 인터넷 검색에 '이한신'이라는 단어를 찍어 보았습니다.
이전에도 그랬듯이 막연한 기대감으로 '이한신'에 관한 기사들을 꼼꼼히 훑어 봤습니다. 혹시나 그 동안 새로운 기사가 올라와 있는지도 모르니까요. 인터넷에 올라 온 이한신이라는 이름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이한신에 관련된 수많은 기사들 중에서 기독교 관련 잡지에 '이한신 목사님'이 쓴 글이 눈에 띄었습니다.
나와 연배가 비슷한 그는 10여 년 전 경기도 용인 땅에 개척교회를 세우기도 했었습니다. 나는 그 잡지에 실린 단체를 찾아 전화를 걸었고 거기서 이한신이라는 사람의 이메일 주소를 천신만고 끝에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찾는 그 친구일 것이라는 확신과 믿음으로 다음과 같은 장문의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안녕하세요? 송성영이라고 합니다. 님께서는 아마 처음 듣는 이름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한신'라는 사람을 애타고 찾고 있습니다. 지금 메일을 받아보시는 분이 제가 찾고 있는 그 '이한신' 님인지는 저 자신도 잘 모릅니다. 어쩌면 동명이인 일런지도 모르니까요.
제가 찾는 사람(이한신)은 21년 전, 그러니까 1982년 4월부터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병 생활을 같이 했던 사람입니다. 당시 제 바로 옆 침상에 누었던 사람인데 그와 나는 취침에 들기 전 혹은 훈련 휴식 시간에, 그 짧고 힘겨운 시간 동안 우리는 종교에 관한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답니다. 그 때 이한신이라는 친구는 전도사(?)였던 것 같습니다. 형님이 경기도 성남에서 목회자로 계셨던가? 너무 오래된 일이라 가물가물합니다.
논산에서 훈련을 마치고 서로 다른 병과에 따라 각자의 부대로 떠났고, 그 이후로도 줄곤 편지 왕래를 하기도 했답니다. 그때도 우리는 종교에 관한 서로의 생각들을 주고받곤 했었답니다.
군 제대 후 그 친구가 찾아왔었습니다. 헌데 내가 그 친구를 그냥 돌려보냈던 같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그 소중한 친구를 돌려보냈던 것일까? 무엇에 그토록 정신이 팔려 있었는지 생각이 잘 나지 않습니다(아마 제가 그때 대학에서 총학생회 일로 정신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때 그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답니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이런저런 일에 몰두하다가 정신세계에 깊이 빠져들어 한동안 홀로 산 생활을 했던 적이 있었답니다. 그때 지나 온 세월을 더듬어 보다가 새파랗게 젊은 시절, 그 한가운데 이한신이라는 친구가 있었답니다.
그와 단 4주간의 만남이었는데 그토록 오랫동안 내 가슴에 남아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때부터 생각날 때마다 그 친구를 찾아 나섰지만 전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답니다.
아마 예산? 어딘가가 고향이라는 기억이 있습니다. 혹여 님께서 그 님이라면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부디 그 이한신이라는 친구이길 바라며... 만약 아니시라면 죄송한 말씀 미리 올립니다.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독백 형식으로 그리움을 담아 보낸 편지였는데 아, 그걸 받아본 사람이 바로 내가 그토록 찾던 그 친구였던 것이었습니다.
이한신, 그 친구는 지금 말레이시아 페낭에 있다고 합니다. 결혼하고 17살 된 아들 하나, 13살 된 딸 하나를 두었다고 합니다. 우연일까? 1990년, '명상'이라는 잡지를 준비하면서 내가 인도행을 꿈꾸었던 그 무렵 그는 한국을 떠나 인도에서 3년 동안 생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싱가폴에서 공부 좀 하고 94년부터 줄곤 말레이시아에서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나는 편지를 다 읽자마자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곧바로 답장을 보냈습니다. 제대 후 나를 찾아왔을 때 그냥 돌려보낸 일을 사죄했고 '<오마이뉴스>에 글 쓰기' 등 지금 내가 하는 일들을 상세하게 적어 가족 사진까지 동봉했습니다.
사진 속에 나는 빡빡 머리 훈련병이 아닌, 긴 머리에 긴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그는 나를 알아 볼 수 있을 것 같다며 다시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알아볼 수 있어요. 예전의 그 얼굴을 떠 올려보았었는데 얼굴이나 몸은 나이에 맞추느라 세월의 풍파에 견딘 모습이구려. 여전히 그 얼굴이라서 아마 거리에서 만나면 역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지난 주간에는 아내와 함께 송형이 올린 <오마이뉴스>의 여러 글들을 읽느라 늦게까지 잠을 안 자서 할 일도 제대로 못한 적이 여러 번 있었어요. 아내는 나보고 좋겠다고 합니다. 내가 원하기도 했던 삶을 친구가 살고 있고 그 내용들을 자세하게 글로 남겨놓았다고 말이지요...(중략)
송형의 글에서 여전히 20대 초에 가지고 있었던 많은 질문들이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많은 이론이 더해졌겠고, 나름대로의 철학이 담을 쳤으리라 믿지만... (중략)
나는 아직 컴퓨터를 잘 몰라요. 우리는 디지털 카메라나 스캐너도 없지만 어떻게 사진을 보내야 할지도 몰라요. 사진을 보내줄 수 없음을 아쉽게 생각합니다... (하략)'
그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 없지만 나 또한 그를 만나면 알아볼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의 편지글에는 20년 전 그의 모습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아주 차분하고 조용조용한 말씨, 사람 좋은 표정을 읽어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 머리 속에 오래 동안 각인되어 있는 그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편지글을 통해 20대 초에 가졌던 생각들에서 얼마나 멀리 와 있는지를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20년 전 나는 아주 즉흥적이고 감정적이었습니다. 오만 방자한 젊은 혈기로 그의 믿음을 시험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그에게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에 천당과 지옥이 있다. 너희들이 말하는 죽어서 천당을 택하느니 차라리 이곳, 지옥을 선택하겠다. 죽어서 가는 천당은 참으로 재미없을 것이다. 담배도 술도 섹스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죽어서 천당보다는 차라리 살아서 지옥을 택하겠다'는 식으로 그를 어지간히도 괴롭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마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아주 편안하게 나를 대해줬고 종교가 왜 필요한지, 왜 하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지를 편안하게 설명해줬던 것 같습니다. 군에서 제대하면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위해 목회자의 길을 걷겠다고 했던 그는 그때 이미 독기 오른 훈련병의 고단함을 다독여 준 나의 목사님이었습니다.
사실 그의 편지글을 통해 지금도 그럴 것이다, 라고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지 나는 잘 모릅니다.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위해 목회자의 길을 걷겠다고 했던 그가 지금은 어떤 목회자가 되어 있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변해 있건간에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그는 인자한 목사님입니다. 지난 20년 동안 가슴에 담아 두고 찾아 헤맸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으니까요.
어제는 우리 집 큰 아이, 인효를 컴퓨터 앞에 앉혀 놓고 그 친구의 메일을 꺼내 자랑했답니다.
"아빠도 이제 스님 친구만 있는 게 아니다, 목사님 친구도 있다. 자 봐라 이게 20년만에 만나게 된 아빠 친구한데서 온 편진데, 이 친구가 아주 맘씨 착한 목사님이셔..."
언젠가 큰 아이가 그랬거든요.
"아빠는 왜 맨날마다 스님 친구만 있구, 목사님 친구는 없어?"
그는 6월 11일 경에 4주 정도 가족들과 함께 한국에 올 일이 있다고 합니다. 4주 동안의 짧은 만남, 그리고 20년 만에 다시 만난 사람, 그 친구를 어서 빨리 보고 싶습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 보고 싶습니다.
그를 다시 만남으로 하여 군대 생활 속으로 사라져 버린 20대 초의 젊은 나를 되찾은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